“화상(火傷)으로 고통받는 소방공무원의 딱한 사정을 듣고 노사가 힘을 합쳤습니다. 그런데 국민안전처의 말 바꾸기에 지쳤습니다.”

　지난 22일 은행권 노사(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는 산별 임금협상을 타결하면서 별도의 의결서를 만들었다. 2년 전 약속했던 소방전문병원 건립 지원을 철회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신 노사는 “소방병원 건립 추진 무산에 따른 대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마련해 시행하기로 한다”고 못 박았다.

　은행권 노사가 소방전문병원 설립을 지원키로 한 건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상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소방전문병원이 없어 많은 소방공무원이 고통받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을 때다. 은행권 노사는 “‘화상은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신체적 고통’이라는 글귀가 가슴에 와닿았다”며 자발적으로 소방방재청(현 국민안전처)에 기부를 약속했다. 그해 9월 노사는 소방전문병원 건립을 위해 사회공헌기금(전년도 임금인상분의 0.3%)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노사가 각각 166억원을 마련해 332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꼬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당초 332억원만 지원해 주면 소방전문병원 건립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 협상 과정에서 건립 비용뿐 아니라 운영비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은행권에 더 큰 금액을 요구했다. 노사가 증액에 난색을 표하자 국민안전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를 지원해 달라며 다시 입장을 바꿨다. 은행권 관계자는 “정부의 말이 바뀌는 것을 보고 노사가 골머리를 앓았다”며 “더 이상 질질 끄는 게 서로 좋지 않다는 생각에 다른 사회공헌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전문병원은 4만(국가직·지방직) 소방공무원의 오랜 염원이다. 연간 300명 정도가 심한 화상을 입지만 경찰병원(서울 송파구)에 병실이 없을 땐 주변 병원을 전전하며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처지다. 1992년 내무부 때부터 건립 얘기가 나왔는데 2002년 소방병원추진위원회가 출범하고도 짓지를 못했다. 2010년 유시민 후보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고, 의원입법(2011년 임동규, 2013년 김민기)도 추진됐으나 늘 재원 마련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때 구세주로 나타난 게 은행권 노사였다. 그러나 국민안전처의 무성의한 대처로 다시 물거품이 될 처지다.

　은행권 관계자는 “2년간의 협의 과정에서 국민안전처를 보며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놔라’는 속담이 떠올랐다”고 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은행권 노사가 지원 계획을 철회했는지 몰랐다. 진상을 알아보겠다”고 답했다.

[출처: 중앙일보] [취재일기] 굴러온 소방병원 걷어찬 안전처